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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그 고독한 혁신의 여정

글요일 선데이 2024. 10. 1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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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그 고독한 혁신의 여정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유영국(1916-2002)의 이 말은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경북 울진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을 겪으며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유영국의 생애 

1916년 울산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의 예술 여정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유영국의 예술 인생은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초기,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의 중기, 그리고 1970년대 이후의 후기다.

 

초기 유영국은 일본 유학 시절 접한 서구 추상미술에 큰 영향을 받았다. "말이 없어 좋다"며 추상화의 길을 택한 유영국. 그의 침묵은 곧 예술적 열정의 다른 표현이었다. 1935년 19세의 나이로 일본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한 그는 이미 그때부터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했다. 1943년 귀국 후,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토대를 다지는 데 주력했다.

 

1938년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정물'은 대상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한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이 시기 그는 한국 최초의 순수 추상화 '구성'(1940)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7년, 유영국은 김환기, 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이는 한국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환기가 서정적이고 음악적인 리듬감이 느껴지는 추상을 추구했다면, 유영국은 보다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추상을 지향했다. 1957년에는 '모던아트협회'를 이끌며 한국 추상미술의 지평을 더욱 넓혔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유영국은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한다. '산' 연작(1957-1967)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한국의 산세를 기하학적 형태로 재해석했다. 특히 1967년 작 '산'은 검은 배경에 흰색과 원색의 기하학적 형태로 산을 표현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후기에 들어 유영국의 작품은 더욱 추상화되고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작품'(1977)은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유려한 곡선과 색면의 조화로, 우주의 질서를 표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유영국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 

유영국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구조주의'와 '순수성'이다. 그는 자연과 우주의 근본 구조를 탐구하고, 이를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히 서구 추상미술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과 서구 추상미술을 융합한 독창적인 시도였다.

 

유영국의 예술 여정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작품 소실, 추상미술에 대한 대중의 이해 부족, 생활고 등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2002년 별세 이후, 유영국의 예술성은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2019년 그의 작품 '산'(1967)이 경매에서 37억 원에 낙찰된 것은 그의 예술적 가치를 방증한다.

 

'산'으로 승화시킨 유영국의 작품 세계

유영국의 작품 세계는 '산' 시리즈로 대표된다. 1964년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산' 시리즈의 출발점이었다. 강렬한 색채와 대담한 구도로 한국의 자연, 특히 '산'을 추상화했다. 1973년 작 '작품'에서 보이는 단풍이 붉게 물든 산의 형상은 그의 예술 세계가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유영국과 같은 해에 태어난 이중섭(1916-1956)이 한국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표현주의적 추상을 추구했다면, 유영국은 보다 순수한 형태의 추상을 지향했다. 또한 후배 작가인 박서보(1931-)가 단색화와 미니멀리즘적 접근으로 나아간 것과 달리, 유영국은 끝까지 강렬한 색채의 힘을 믿었다. "네가 보는 대로 보면 된다"라고 말했던 유영국. 그의 작업 과정은 치열했다. 아들 유건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완성된 그림도 끊임없이 고쳐나갔다. 이는 그의 예술에 대한 완벽주의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유영국의 예술 세계는 단순히 캔버스 위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 약수동 적산가옥에 살던 시절,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안방 앞 좁은 마루에서 소품을 그렸다는 일화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가격을 그런 식으로 매기는 게 아니다"라며 작은 그림의 가치를 알아봤던 그의 안목은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해외에서 주목받은 독창적인 미술 

최근 유영국의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뉴욕 페이스갤러리 개인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 전시 등을 통해 그의 예술성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마크 로스코 같다", "원색의 깊이와 풍부한 에너지가 놀랍다"는 해외 평론가들의 평가는 유영국 예술의 보편성과 독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유영국은 말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나는 그림과 싸운다." 이 말은 그의 치열했던 예술 인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한 예술가의 고뇌와 열정,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유영국의 예술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순수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한국적 정체성과 세계성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그의 작품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하나의 답이자, 또 다른 질문의 시작점이 된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유영국. 그의 고독했던 혁신의 여정은 한국 추상미술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우리 미술계에 여전히 큰 영감을 주고 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순수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는 그의 작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미술관 벽면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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